올미아트스페이스 3월 기획 가나인 초대전 <겹쳐진 세계 Metaverse>
전시작가 | 가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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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기간 | 2022-03-08(화) ~2022-04-06(수) |
초대일시 | 2022-03-08 12:00 AM |
1.가나인_적요심곡_2021_캔버스에 아크릴_각각 8x8cm
2.가나인_이것이 삶이다_2022_우드판넬에 아크릴 및 혼합재료_60x90cm
3.가나인_메타버스 이브의 출산_2022_우드판넬에 아크릴 및 혼합재료_30.8x40.8cm
4.가나인_메타버스의 정원_2022_우드판넬에 아크릴 및 혼합재료_51x40.8cm
5.가나인_메타버스 4명의 아담과 이브들_2022_우드판넬에 아크릴 및 혼합재료_51x40.8cm
6.가나인_메타버스 길 찾는 아담_2022_우드판넬에 아크릴, 브론즈 및 혼합재료_40.8x30.8cm
7.가나인_메타버스 인드라망_2022_우드판넬에 아크릴 및 혼합재료_51x51cm
8.가나인_메타버스 아담과 이브_2022_우드판넬에 아크릴 및 혼합재료_40.8x30.8cm
9.가나인_메타버스 6개의 중첩_2022_우드판넬에 아크릴 및 혼합재료_51x40.8cm
10.가나인_온전한 삶을 찾아 떠나는 길_2022_우드판넬에 아크릴, 브론즈 및 혼합재료_91x60cm
11.가나인_메타버스 4번째 사과_2022_우드판넬에 아크릴, 브론즈 및 혼합재료_51x40.8cm
12.가나인_메타버스의 아담과 이브_2022_우드판넬에 아크릴, 브론즈 및 혼합재료_51x51cm
13.가나인_왜(Why)?_2022_우드판넬에 아크릴, 브론즈 및 혼합재료_51x40.8cm
14.가나인_비무장지대 (DMZ)_2020_캔버스에 아크릴_45x98cm
15.가나인_비무장지대 (DMZ)_2020_캔버스에 아크릴_52x65cm
16.가나인_삶_2013_캔버스에 아크릴_60x90cm
<겹쳐진 세계 Metaverse>
가나인 (1957~) Kanain
1993년 신자연주의 미학 선언
<주요개인전>
2022 <겹쳐진 세계 Metaverse>, 올미아트스페이스, 서울
2015 <우리 미래의 비젼을 보다>, 최지혜 갤러리
1997 <두번째 기인전> Foyles gallery, 런던
1983 <실험시전>, 공간사랑
<주요그룹전>
2021 왜 우리라고 세계를 말할 수 없는가, 올미아트스페이스, 서울
신자연주의 리좀이 화엄을 만날 때, 전북도립미술관, 완주
2019 당신의 몸이 신자연이다 – 신자연주의 26주년 기념전, 담빛예술창고, 담양
2017 신자연주의 두 몸의 만남 – 가나인, 정복수, 경인미술관, 서울
작가 노트 中
견고한 삶을 위해서
삶이란 이렇게 내가 뭔가 어떤 행동을 유발할 때만
그것과 맞닿은 사건과 만남이 일어나고,
그것과 맞닿은 다른 앎을 통해서 견고해 진다.
Let’s create matter from light!
이 문장에 나는 다시
Let’s create matter from the light of life로
삶의 빛(lite of life)으로 바꾸고, 빛을 정관사(the)로
확 눌러놓으면,
삶의 빛을 찾는 창조적 작업으로 환원된다.
모든 생명이 형성되고 그것이 운동구조를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질서가 세워지는 논리를
창작의 논리와 기본 구조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터무니없는 무생물적 재료에
단지 색과 선으로 칠하고 그어
그것이 살아있는 언어를 만들어내는
기묘한 생물체(예술작품)로 환원시키게 된다.
그림이 시대를 초월해 보는 이에게 말을 걸어오고,
한 작곡가의 음악을 평생 귀에 딱지에 밖히도록
들어도 무언가 늘 새로운 감정이입을 해주는 것도...
7번이나 읽은 헤세의 데미안이나
10대에도 두번 읽고, 20대에도 읽고, 다시 40대와
50대에 같은 책을 읽어도 새로운 메시지를 들려주는
불멸의 힘이 바로 이같은 원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단지 나는 내가 살아있기에
내가 살아가는 몸의 논리를
내 작업에서 드러나게 증언하는 것 뿐인데...
그것이 그렇게 힘든 것이 바로 이것이다.
Let’s create matter from the light of life....
<작업일기 2021, 1월 23일 새벽, 3시 03분>
중첩문화의 힘이란?
인생이란 참으로 신비한 것이다.
이제 또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련지,
오늘 새벽,
사이 톰볼리를 명상하다,
사이 톰볼리의 계보와 다시 그가 대립적으로 자각한
사이 톰볼리가 선 반대의 입장과 그가 부정한 것들을 명상하고,
다시 그에대한 아방가르드와
그의 아방가르드를 놓고 사색하다
변증법적 유물론적 정반합의 대립으로 전개된
미술사의 계보학이 머릿속에 선연하게 그려졌다.
삶이란 얼마나 무궁무진한가?
끝도 시작도 없는 마음의 넓이가
이 유한적이고 한계적이고 한시적인
몸 안에서 펼쳐진다니?
그것도 누구나, 아무나의 몸과 마음 속에서...
작년 이 때도 한 겨울을 작업에 대한 열기로
뜨겁게 보냈다.
나에게 전시한다는 의미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다시 연다는 뜻으로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 새롭다는 것만은 아니다.
새로운 무엇인가는,
세계와 사람, 사람과 사람 그 진실과 관계,
혹은 역사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그 신비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새로운 조형언어,
물론 세상의 시점에서 보면 언제나 낡고
상투적이고 그저 그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일단 그것에서 벗어난
‘몸짓’을 드러내려고 늘 앓는다.
물론 내가 작업으로 드러내는 것도 내 ‘몸짓’이고
내가 조형이미지로 드러내는 것도 ‘몸짓’이다.
중요한 것은 그 ‘몸짓’이 어느 곳에 있어도
죽어있는 물질이 아니라,
살아있는 또 하나의 ‘몸짓’으로
누군가의 마음에 파고들 수 있는
살아있는 ‘몸짓’이어야 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늘 내 작업에서 추구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생명을 불어넣고
내 몸짓을 풀어 놓은 내 작업이
누군가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는
하나의 그냥 그저 그런 그림판이라면
나는 작가가 아날 것이다.
이같은 사실에 나는 언제나 작업 앞에서
진통을 앓는다.
<작업일기, 2022, 1, 15>
메타버스 세계 속의 나
한 개인의 몸과 마음 속에 펼쳐진 세계를
이젠 누구나 아무나 알릴 수 있다?
얼마나 매혹적인 세상인가?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문제다.
아무 말이나 아무 정보나 거르지 않고
쏟아 낼 수 있다는 것...
무엇이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무엇이 세상과 적절한 소통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나를 속이지 않고
무엇이 나를 진정으로 위한 것인가?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은
배우고 깨닫는 것이 세상의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고
자신을 스스로 기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은
그 위에서만 성장과 업데이트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감성이나 이성적
판단을 내재한 식견을 갖는 것은
정말 중요한 과제다.
고전과 역사서, 철학과 그 밖에 인문학 서적을
통하여 좌 우와 위 아래를
끊임없이 곁눈질하는 것은
중심을 잡고 미래를 예견하며
비전을 갖고 오늘 이 순간을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한 것이고
정도를 가며, 보이지 않는 세계와 연대를 갖고
사는 유일한 길이다.